* 글의 목적
: 국립중앙박물관 -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관람을 위한 나의 역사 공부
작품을 이해기 전에 전반적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사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튜브와 구글링을 통해 공부한 내용을 적어본다.
* 합스부르크 가계도
* 파란색 : 스페인계열 합스부르크
* 검정색 : 오스트리아계열 합스부르크
* 녹색 : 외부
* 빨간색 : 근친
1. 신성로마제국
고대로부터 게르만족 (독일인)들은 선거로 지도자를 뽑는 전통이 있었다. 명망 있는 씨족의 족장들이 모여 부족장을 뽑는 것이다. 서로마의 멸망 이후 들어선 프랑크 왕국이 서/중/동 프랑크로 분열되자, 동프랑크 왕국에서 유력한 귀족들과 가톨릭 대주교들이 고대의 전통대로 왕을 뽑으니, 그것이 ‘독일왕국’이다. 이후로 국왕 선거권을 가진 대주교들과 공작들은 ‘선제후’라고 불렸다. 그리고 서기 962년, 독일 왕국의 국왕 오토 1세가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황제의 관을 받으면서 ‘신성로마제국’이 출범하고, 로마교황은 교권을, 신성로마 황제는 세속을 지배하는 중세 유럽의 질서가 형성된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는 방식은 독특했다. 선제후들이 독일 왕을 뽑으면, 독일 왕이 이탈리아로 가서 교황의 대관을 받고 로마 황제로 즉위하는 것이다. 이렇게 복잡하고 다양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만큼, 신성로마제국의 황권은 항상 불안정했다. 1250년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프리드리히 2세가 황위를 세습하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이후 공식적인 황제가 20년 넘게 뽑히지 않는 ‘대공위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대공위 시대 와중에, 체코 계열의 제후국이었던 보헤미아 왕국(아타카르 2세)이 제국 남동쪽의 요충지 오스트리아 공국을 합병하며 크게 성장하자 독일계 선제후들은 그제야 황제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2. 루돌프 1세
1273년 20여 년 만에 정식으로 황제 선거가 열리고, 그렇게 새로운 황제로 즉위한 인물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였다. 이후 수백 년 간 유럽과 전 세계의 정세를 좌지우지한 대가문이 역사 전면에 등장했다.
“ 오스트리아가 세계를 지배한다 ”
합스부르크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고 어떤 유산을 남겼는가?
새로운 황제가 선출된 건 좋았는데, 이게 상당히 뜬금없는 일이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서 깊은 부족 공국도, 선제후국도 아닌 일개 백작 가문이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본래 스위스 아르가우 지방의 작은 마을 ‘하비히츠부르크’에 성을 쌓고 서기 11세기부터 백작을 칭한 깡촌 세력이었다. 대공위 시대 직전까지의 황가였던 호엔슈타우펜 가문과는 슈바벤 공작과 봉신이라는 관계로 동고동락한 동향 가문이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2세가 생전에 루돌프 1세의 대부를 서 주는 등 어느 정도 친분관계가 있는 정도였다. 선제후들은 괜히 황제 자리를 먹었다가 집중포화를 맞을까 봐 두렵고, 그렇다고 다른 가문에서 황제 자리를 먹는 건 또 싫었다. 그래서 적당히 명분도 있고, 세력은 작은 가문을 찾다가 낙점된 게 바로 합스부르크 가문! 그렇게 루돌프 1세가 뜬금없이 소환돼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에 앉게 된다. 일종의 바지사장이었다.
그러나, 루돌프 1세는 바지사장으로 만족하지 않고, 가문의 기틀을 다졌다. 독일계 제후들의 가장 큰 위협이었던 보헤미아(아타카르 2세)를 격파!, 그동안 먹은 땅들을 다 토해내게 했는데, 이때, 이 지역들을 은근슬쩍 자기 아들인 알브레히트 1세에게 줘버렸다. 이영지가 바로 훗날 합스부르크의 본거지가 되는 오스트리아 공국과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이다.
만만하게 봤던 루돌프 1세가 생각보다 급성장을 하자, 제후들은 다시 위기를 느끼고 나사우 가문의 아돌프를 차기 독일왕으로 선출했다. 루돌프 1세의 아들 알브레히트 1세가 전쟁 끝에 아돌프 1세를 격파하며 황위를 지켜내는 듯싶었지만, 1308년 조카에게 암상당해 버린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그렇게 황제 자리에서 밀려나 다음 대권을 노리게 된다.
3. 알브레히트 5세
제국 내 요충지였던 오스트리아를 새로운 본거지로 재정비를 시작한 합스 부르크 가문은 150여 년이 지난 알브레히트 5세 대에 이르러 다시금 제국 왕좌를 꿰찰 수 있게 된다. 지기스문트 황제의 딸과 결혼한 알브레히트 5세가 보헤미아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점수를 따고 사실상의 상속권자로 지명! 실제로 지기스문트 황제가 죽은 뒤,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되었다. 오스만과의 전투가 한창이었던 만큼, 알브레히트 5세는 전장에서 죽어버렸지만 친척이었던 프리드리히 3세가 재차 황제로 선출되면서 그 권력을 이어받는 데 성공했다.
4. 프리드리히 3세
프리드리히 3세는 “A.E.I.O.U”라는 머리글자를 즐겨 사용했는데, 이걸 해석하면 ”오스트리아가 세계를 지배한다. (Austria Est Imperatre Orbi Universae)”한다는 뜻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이 말은 이후 채 100년도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된다. 프리드리히 3세는 가문의 본거지인 오스트리아를 오스트리아 대공국으로 승격시키며 가문의 영지 확장과 황위 세습을 위한 빌드업에 들어갔다. 합스부르크의 주특기로 유명한 “정략결혼”이 이 사람 때부터 슬슬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최대한 많은 가문과 결혼하고, 전쟁은 되도록 피하면서 천하를 손에 얻는다는 전략이었죠. 프리드리히 3세는 자기 아들인 ‘막시밀리안 1세’를 부르고뉴 공작의 외동딸과 결혼시켜 서유럽에까지 영지를 확보하고, 황제 자리까지 스무스하게 넘기면서 세습에 성공했다.
5. 막시밀리안 1세
그리고 이 전략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막시밀리안 1세는 부르고뉴 공작령을 두고 전쟁을 벌이던 프랑스 발루아 왕가를 견제하기 위해 이베리아 반도에 자리 잡고 있던 스페인 왕가와 겹사돈을 맺어버린다. 즉, 딸 마르가레테는 아라곤 왕세자 후안에게 시집보내고, 부르고뉴 공작이었던 아들 필리프는 또 후안의 막내 여동생이었던 후아나에게 장가를 보낸다. 그런데, 단순히 우방을 확보하려고 추진했던 이 전략이 잭팟이 되어버린다.
6. 필리페 1세
후안 왕세자가 아들 없이 죽고, 언니 이사벨까지 일찍 죽으면서 후아나는 어머니 이사벨 1세가 다스리던 카스티야를 물려받아 여왕으로 즉위한다. 후아나가 정신병 때문에 통치 능력이 없다고 인정받아서 합스부르크의 필리프가 공동왕 필리페 1세로 같이 즉위하게 된다. 합스부르크 가문 입장에서는 이베리아 반도까지 꿀꺽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펠리페 1세가 즉위하자마자 의문사하면서, 어린 아들이었던 카를 대신 카스티야는 장인어른이었던 아라곤의 왕 페르난도 2세가 섭정 자격으로 통치하게 된다. 막시밀리안 1세는 손자인 카를를 네덜란드로 보내 교육시키며 후일을 도모했다.
7. 카를 5세
그리고 1516년, 페르난도 2세가 끝내 아들을 보지 못하고 사망, 카를이 카스티야와 아라곤을 동시에 물려받아 카를로스 1세로 즉위하면서 스페인 왕국이 출범했다. 여기에 스페인이 개척하기 시작했던 아메리카와 아시아의 해외 식민지, 그리고 아버지 펠리페 1세의 영지였던 부르고뉴 공작령은 덤이었다. 거기다 1519년에는 친할아버지인 막시밀리안 1세가 죽으면서 카를은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비롯한 합스부르크 영지들까지 모두 물려받은 동시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로 즉위하고 독일 지역까지 손에 넣는다. 모든 상황이 맞아떨어지면서 유럽역사상 가장 거대한 영토를 상속받은 인물이 된다. 가문이 직접 소유한 수많은 영지들에 황제로서 지배하는 신성로마제국까지 카를 5세와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럽과 아메리카 아시아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손에 넣게 되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제국은 가문 소유의 영지를 덕지덕지 이어 붙인 불연속적인 정치체제! 거기다 종교개혁의 불길이 점점 거세지면서 신성로마제국 내부 결속력이 흔들리고 있었다. 때문에 카를 5세는 동생 페르디난티 1세를 신성로마제국의 섭정으로 앉히고 (네가 동쪽을 맡아!), 본인은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 경영과 네덜란드, 지중해 등에 집중한다. 그리고 이런 분할 통치가 고착화되면서 어쩔 수 없이 신성로마제국 황위와 오스트리아 영지는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페르디난트 1세에게, 그리고 스페인왕위와 신대륙, 부르고뉴 공작령은 아들인 펠리페 2세에게 물려주게 된다. 그렇게 합스부르크 가문은 스페인 계열과 오스트리아 계열로 분가하여 다른 길을 가게 된다.
8. 분가 통치와 근친혼
하지만 결혼을 통해 설계해 놓은 합스부르크의 전략은 여전히 잘 먹혀 들어갔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어머니 쪽 혈통을 통해 포르투갈 왕위와 해외 식민지까지 차지하며, 해가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했고,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1세 역시, 막시밀리안 1세의 기획 아래 보헤미안 왕실과 겹사돈을 맺어 놓았기 때문에 헝가리, 보헤미아, 크로아티아의 왕위까지 차지하고, 오스만 제국의 침략 저지! 기독교 세계를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전성기도 오래가진 않았다. 합스부르크는 남자에게만 유산을 상속하는 게르만족의 관습법인 살리카법을 통해 정략결혼으로 많은 부와 권력을 축적할 수 있었지만, 반대로 결혼 때문에 이걸 다시 잃어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에 걱정이 많았다. 여기다 양쪽 분가 통치하는 지역이 서로 멀고, 종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차이가 있어서 언제 서로 적으로 돌변할지 불안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런 걱정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자 찾은 방법이 하필 근친혼이었다.
남계 혈통을 끊기지 않게 이어가면서, 두 분가 사이의 확실한 연결고리를 유지하려 했던 거였다. 자연의 섭리는 거스르는 이런 위험한 결혼이 많아지면서, 세대가 지날수록 유전병을 앓거나 허약한 지도자들이 등장했다. 특히 스페인 쪽 분가에서 이런 일이 빈번해서, 가문의 통치 역량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을 다스리던 오스트리아 쪽은 이런 문제가 덜한 편이었지만 오스만 제국과의 오랜 전쟁과 보페미아 신교도 세력의 반란 때문에 위기에 처했다. 루돌프 2세 때는 이 상황을 피하기 위해 보헤미아의 프라하로 수도를 옮기고 현장에서 통치하려 했지만, 이것도 역부족이었다. 결국 1612년, 30년 전쟁이 터지면서 신교와 구교의 대립은 전 유럽을 끔찍한 전쟁으로 몰고 간다. 유럽 전역을 지배하던 합스부르크 가문과 가톨릭 국가였던 신성로마제국은 막대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9. 스페인계 합스부르크의 끝
30년 전쟁이 끝나고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면서 유럽 전역에서 종교의 자유가 인정된다. 그리고 가톨릭의 수호자라는 명분으로 제후들 위에서 군림하던 신성로마제국은 말 그대로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고, 제국도 아닌 빈 껍데기가 되어버렸다. 스페인은 돈줄이었던 네덜란드가 독립하면서 경제적으로 커다란 타격을 입었고, 포르투갈마저 분리되어 나가면서 해외 식민지를 다수 잃게 되었다. 여기에 18세기가 시작되면서 합스부르크의 주특기였던 전방위적인 정략결혼이 부메랑으로 돌아와 전 유럽에서 합스부르크 영지들의 계승권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우후죽순 나타나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우리 엄마도 합스부르크야!) 그렇게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양쪽에서, 두 차례의 왕위 계승 전쟁이 이어지게 된다.
일단 첫 빠따로, 스페인 쪽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로스 2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서 프랑스 루이 14세와 합스부르크의 레오폴트 1세를 필두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난다.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합스부르크의 레오폴트 1세를 필두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난다. 이 전쟁의 결과로 스페인 왕위는 루브봉 왕가에게 넘어가고, 스페인 쪽 합스부르크의 계보는 끊어지게 된다.
11. 마리아 테레지아
오스트리아 쪽 분가(레오폴트 1세)에서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남부 등 나머지 영지를 인수하긴 했지만, 합스부르크는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상실하면서 서유럽에서의 영향력을 거의 잃어버렸고 이후로는 동유럽으로 확장하면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그리고 레오폴트 1세의 아들 카를 6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위를 이어받은 뒤, 오스트리아 쪽 분가도 위기에 처한다. 하나뿐인 아들이 어린 나이에 죽어버리면서, 카를 6세에게는 딸만 있는 상태였다. 오스트리아가 스페인과 같은 사태를 맞이할까 두려웠던 카를 6세는 혹시라도 자기가 끝까지 아들을 보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1713년, 딸도 왕위를 상속할 수 있도록 하는 ‘국사조칙’이라는 법을 제정했다. 카를 6세가 끝내 아들을 다시 얻지 못하고 죽으면서 이 걱정은 현실이 됐고, 1740년 딸이었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모든 영지를 물려받게 된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기존의 계승권자들이 곧바로 태세전환해서 군대를 몰고 왔다. 바이에른 선제후국이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지원을 업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일으켰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가문의 분열을 막기 위해 맞서 싸웠지만 역부족이었고, 프로이센에게 슐레지엔 지역을 넘겨주고 나서야 겨우 계승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남자만이 오를 수 있던 신성로마제국 황위는 그렇게, 로트링겐 공작 ‘프란츠 슈테판’이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1세로 즉위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합스부르크 - 로트링겐’이라는 이름으로 그 계보를 이어나가게 된다.
12. 프란츠 2세
이후로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신의 딸인 마리 앙투아네트를 루이 16세에게 시집을 보내면서 전통적인 관행을 깨고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뒤 프로이센과 다시 전쟁(7년 전쟁)을 시작했다. 서유럽과 볼일이 없어진 합스부르크 입장에서는 이제 프랑스보다 독일지역 내의 패권을 노리는 프로이센이 더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18세기 내내 일어났던 가문의 위기들 중 정점을 찍는 대 사건이 터지는데, 다름 아닌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의 등장이다.
전 유럽에 영지를 가지고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혁명의 불길을 반드시 막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루이 16세에게 시집갔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과 세트로 처형당하면서 명분도 생겼겠다 프란츠 2세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합세해 프랑스에 대한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스페인과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모두 참패를 겪게 된다. 합스부르크는 벨기에와 북이탈리아, 신성로마제국 영역의 독일계 제후국들까지 모조리 프랑스에게 빼앗기면서 오히려 수세에 몰린다. 거기에 1804년, 나폴레옹이 국민투표를 열어서 스스로 프랑스인의 황제로 즉위해 버렸다. 그간 유럽의 황제는 오로지 신성로마 황제 하나뿐이었는데, 이 룰을 깨버린 것이다. 거기다 제국 내의 제후국들 대다수가 나폴레옹 손안에 있는 상태로, 사실상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이제 명분도, 실체도 없는 지경에 이렀다. 이에 합스부르크의 프란츠 2세는 맞불작 전으로, 그냥 자신만의 타이틀을 만들기로 한다. 가문의 영지들을 전부 합쳐서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재편! 스스로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1세로 즉위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반격, 그러나 결과는 또다시 패배였다. 오스트라이의 수도 빈이 함락당하고, 신성로마제국은 아예 공식적으로 해체 돼버렸다. 중세 초부터 지속되어 온 종교적, 봉건적 전통이 완전히 무너지고, 신성로마 황제로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가지고 있던 독일에 대한 지배권도 완전히 사라졌다. (쉰브룬 조약) 러시아 원장 실패로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에도 기존의 영지 중 대다수는 영영 되찾을 수 없었고,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제 그냥 ‘오스트리아 황가’가 됐다.
한편, 프랑스혁명으로 촉발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물결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전 유럽에서 하나의 민족, 하나의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민족국가라는 개념이 대세로 떠오릅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제국은 기본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들을 억지로 합쳐놓은 국가!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존재하는 중세적인 면이 남아있었다. (우리 황제는 왜 독일인?) 그 때문에 전국에서 독립요구가 빗발치며 좀처럼 통합되지 않았다. 특히나, 제국 영토와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헝가리 인들이 가장 극렬하게 독립을 요구했다. 결국 1867년,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헝가리 인들에게 손을 내밀어 대타협을 제안한다. 한 나라이되, 두 나라가 거의 대등한 자치권을 가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을 만들자는 거였다. (오스트라이 헝가리 대타협) 이 대타협이 타결되면서 오스트리아는 동유럽 다민족 국가로 재편되고, 독일 북쪽의 나머지 지역은 프로이센의 주도로 통일 되어 독일 제국이 세워져 각자 다른 길을 가게 된다.
13. 카를 1세 - 마지막 황제
이런 대타협을 바탕으로 오스트리아는 20세기까지 강대국의 자리를 유지하지만, 민족주의는 더더욱 무르익었고, 사람들은 외국인 귀적이 지배하는 세상을 더 이상 원치 않았다. 그리고 이런 분열의 불씨는 결국, 중세와 근대를 호령했던 대가문 합스부르크의 황혼을 불러왔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의 황태자였던 프란츠 페르난트 대공이 군사훈련을 참관하러 보스니아에 갔다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하는 대사건(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나고, 그렇게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패전한다. 세계대전에서 패배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600년간 차지했던 오랜 권좌에서 내려오게 된다. (카를 1세)
제국 내의 민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독립했고, 오스트리아 본토에도 공화국이 들어선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지막 황제였던 카를 1세는 퇴위하여 (그동안 합스부르크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족과 함께 오스트리아를 떠났다.
14. 빈 미술사 박물관
근대적인 민족국가들이 형성되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수많은 귀족 가문들이 몰락하여 사라졌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은 그 백성들로부터 많은 존경과 신뢰를 받아 중세부터 근대까지 600년 간, 수많은 도시와 나라를 지배하여 이어져 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길고 긴 세월만큼 세계사 전체를 관통하여 수많은 유산을 남겼다. 특히나 유럽의 여느 귀적들처럼 합스부르크는 예술의 후원자로서, 그리고 수집가로서 진심을 다했다. 때문에 가문의 본산이었던 오스트리아의 빈은 지금까지도 예술의 도시라는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그리고 이런 합스부르크 예술 역사의 정수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 빈 미술사 박물관이다. 1858년,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의 명으로 건립된 이 미술관은 가문의 길고 긴 역사만큼, 시대를 초월한 다양한 보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 참조 유튜브 : https://youtu.be/P2b_qUljSh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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