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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와 관심사/공연, 뮤지엄

합스부르크 작품

by 새콤한딸기🍓 2023. 3. 9.



* 글의 목적

: 국립중앙박물관 -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관람 전에 나의 역사와 <작품> 공부




작품은 뭐든 그 역사와 작가의 생애를 이해해야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했던가? 아주 어렵게 구한 합스부르크 작품 티켓을 좀 더 빛내줄 공부를 하며 기록으로 남겨본다. 전체적인 역사보다는, 이번 합스부르크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 주요 작품들을 뽑아 작품 위주의 역사를 공부하기로 한다.







1) 합스부르크 가문 가계도

내가 정리한 가계도

* 파란색 : 스페인계열 합스부르크
* 검정색 : 오스트리아계열 합스부르크
* 녹색 : 외부
* 빨간색 : 근친


공부하다보니 가계도가 필요했고 가계도를 보면서 순서대로 읽어가니 재미있었다. 무엇보다도, 나중에 근친결혼을 할 시점에 도대체 얼마나 막장으로 근친하는지 직관적으로 보고싶어서 정리한 것도 있었다. 가계도 인물이 워낙많아 줄인게 이정도인데, 권력과 탐욕이 낳은 결과물은 정말 충격일 뿐니다. 하지만 그런 욕구 덕에 생겨난 수많은 작품들이 여기에 왔다.


가계도 위에서부터 하나씩 합스부르크 작품에서 주요한 인물을 읽어본다.




 

1) 루돌프 1세

스위스 합스부르크 성에서 출발한 가난한 백작에 불과했던 이 가문이 정략결혼과 전쟁을 통해서 세를 넓혀, 거의 프랑스 영국을 제외하고 유럽의 많은 땅을 지배했다. 신성로마 제국 그 황제가 되는 초대 왕이 루돌프 1세다. 신성로마는 특정한 국가보다, 로마를 계승하는 중앙 유럽의 다민족 영토 복합제 제국이다. 루돌프 1세가 합스부르크 최초의 보통 로마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루돌프 1세부터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최초의 왕을 배출한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3세를 거쳐 막시밀리언 1세 때 본격적으로 세를 넓힌다.

 
 



2) 막시밀리언 1세

베른하르트 스트리겔 - 막시밀리언 1세 초상화


15세기말부터 16세기 초까지 집권한다. 프랑스 경계에 있는 부르고뉴, 하나의 공국이었다. 마리 드 부르고뉴 여공작과 정략결혼 후에 이 영토를 편입시켰다. 지금의 네덜란드와 벨기에 지방을 편입시키고 아들 펠리페 1세를 스페인의 위대한 이사벨 여왕의 딸 후아나 공주와 결혼시켜서 합스부르크 왕가가 본격적으로 스페인에 진출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준 게 바로 막시밀리언 1세이다.


 


3) 펠리페 1세와 후아나공주

펠리페 1세 초상화

 

후아나 공주 초상화


펠리페는 미남왕이었다고 한다. 미남왕답게 바람을 많이 폈고 후에 후아나가 미쳐버리게 된다. 별명이‘광녀 후아나’로 붙여지게 된다. 펠리페 1세가 죽으면서 후아나가 스페인의 왕이 되는데, 미치다 보니 수도원에 유폐되고, 실질적으로는 까를 5세 아들이 왕이 된다. 까를5세는 개이득으로, 펠리페1세와 후아나가문이 다스리던 모든 땅을 얻게된다. 합스부르크의 전성기, 세계사적인 국왕이 된다.




 

4) 까를 5세

티치아노 화가 뮬베르그 - 까를 5세 초상화

 

티치아노 화가의 뮬베르그 - 까를 5세 초상화

"해가 지지 않는 해양제국" 스페인 창건자

까를5세도 왕가의 다른 통치자들처럼 평생 ‘합스부르크 턱 = 주걱턱’으로 인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유전적 결함으로 입을 제대로 다물지 못해 늘 입을 벌리고 자야만 했고, 자꾸 침을 흘리며 불명확한 발음으로 남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평생 후유증에 시달렸다. 튀어나온 턱을 가리기 위해 수염을 길렀다.

합스부르크 턱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다. 아직 근친혼이 이뤄지지 않았고, 루돌프 1세에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왕가 자체의 유전자 결함이 원인이라는 주장과 14세기 말 ‘철의 공’ 에른스트의 아내인 침바르카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 등이 있다.

여러 가설이 있기 때문에 유전자 결함의 정확한 기원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많다. 따라서 매부리코에 좁고 긴 얼굴을 한 얼빠진 듯한 외모를 한 카를 5세는 스페인에 왔을 때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 호감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까를5세 자녀부터 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근친결혼이 시작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턱의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진다.


까를5세는 "최고의 금수저"다.


친가를 먼저 보면, 친할아버지가 막시밀리언 1세로 신성로마 제국의 많은 영토를 물려받았다. 프랑스 영국을 제외하고 거의 많은 부분에서 합스부르크 왕가가 많은 영향을 행사할 때 그 많은 영토를 물려받고, 또 외가는 이사벨 여왕 스페인 왕가다. 스페인 그리고 대항해시대 때라서 신대륙까지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지배했던, 해가지지 않는 제국은 영국이 먼저가 아니라 스페인이 먼저였다. 당시 스페인의 전성기 시작이었고 또 신성 로마 제국도 역시 잘 나갔던 시절이다.


그러나, 신대륙 발견하고 식민지에서 나왔던 금을 스페인을 위해서 쓰인 게 아니라 전쟁을 하면서 많은 재정이 해외로 유출되었다. 그래서 당시 스페인 사람들은 의외로 잘 살지 못했다. 그리고 까를 5세가 주로 전쟁에 나가 있었고, 어릴 때 스페인에 살지 않다 보니가 스페인 말도 제대로 하지 못 했다 한다. 그래서 스페인 사람들은 까를 5세를 실질적으로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경우도 되게 많다.






 

5)  펠리페 2세

소포니스바라 화가 - 펠리페 2세 초상화


까를 5세의 아들이 바로 펠리페 2세인데, 이 분은 진짜 스페인의 왕이다. 워낙 영토가 많다 보니 이 까를 5세가 신성로마제국은 동생이었던 페르디난트 1세에게 물려준다. 그리고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스페인과 남미 땅을 물려준다. 시대를 잘 타고났다. 전성기 때 국왕이다. 무적함대 시절이 바로 펠리페 2세다. 펠리페 2세는 총 4번의 결혼을 하는데, 그중 영국에 시집간 카탈리나의 딸 메리여왕과 결혼한다.





안토니스모르 - 메리 1세


재위기간 동안 로마 가톨릭 복고정책으로 개신교와 성공회를 탄압하여 블러디 메리(Bloody Mary, 피의 메리)라는 별명이 붙었다. 메리 1세가 영국 신교도들을 숙청했다고 해서 피의 메리라고 불린다.
메리 1세 부인이 죽고, 그녀의 이복동생 엔볼린의 딸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청혼을 하는데 거절을 당한다. 남미에서 그 많은 전리품들을 가져오는데 해적 때문에 많이 약탈당했다. 영국이 이전에 되게 못살았는데, 스페인 함선을 노략질해서 국가의 재정에 쓸 정도로 해적 노략질을 적극 권장했던 게 바로 영국이다. 굉장히 오랑캐적이었다. 그 대표 오랑캐가 바로 드레이크 해적이었다.  화가 난 펠리페 2세가 엘리자베스 1세에게 드레이크 해적을 사형시키라고 명령을 했다. 처음에는 알겠다고 했는데, 스페인에서 온 사신이 온 자리에서 드레이크 해적에게 기사 작위를 내린다. 펠리페 2세가 제대로 빡친다. 그래서 일으킨 게 바로 칼레 해전이다.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영국 전함의 대결이다.





필립 자크 드 루터부르그. 스페인 함대의 패배


- 무적함대 전함
병력이 말도 안 되게 차이가 난다. 스페인 무적함대 28000여 명, 전함 127척 그리고 영국 1500여 명, 전함 80척, 말도 안 되는 전투력 차이인데, 보기 좋게 영국이 승리하고 무적함대가 침몰한다. 영국의 전술 승리라고 많이 보지만, 실질적으로 운이 많이 작용한 전투였다. 풍랑을 잘못 만나서 배가 알아서 뒤집어졌다. 실질적으로 싸우다가 침몰한 배는 10척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무적함대라는 별명을 영국에서 지어줬다는 말이 있다. 적수가 안 나타나서 무적함대라고도 불렸다.





엘리자베스 1세 초상화

위 초상화 속 여왕은 그녀의 손가락이 미국에 있도록 지구에 그녀의 손을 얹고 앉고, 배경에는 무적함대 해전 에피소드의 이미지가 있다.







6) 펠리페 4세

디에고 벨라스케스 - 펠리페 4세 초상화


펠리페 3세를 거쳐 펠리페 4세가 되면서 합스부르크 립이 더 심해진다. 턱이 더 튀어나온다. 국왕 초상화조차 미화를 시킬 생각이  전혀 없는 사실주의 성향이 강한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작품이다. 그럼에도 타고난 재능을 알아본 펠리페 4세는 비록 주걱턱은 이렇게 그려줬으나 디에고 벨라스케스를 매우 총애했던 그런 국왕이었다. 문제는 무적함대가 침몰하고 계속 전쟁에서 패하고 나라가 망해갈 때에 하필이면 무능한 국왕을 만났다는 것은 스페인에게서는 좀 불운이었다.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사냥을 되게 좋아했다. 그림 수집, 예술에만 관심이 많았다. 그래도 다행히 예술에는 조예가 깊어서 무명이였던 벨라스케스의 재능을 알아보고 궁정화가로 키워내면서 역사적인 화가를 배출시킨 공이 있고, 또 이탈리아 플랑드르 등의 수많은 명작들을 사 오게 만든다. 그래서 지금의 ‘프라도 미술관’ 왕립 컬렉션의 규모를 엄청 키우게 만든 큰 공을 세웠다.





* 디에고벨라스케스 작품

디에고 벨라스케스 "시녀들"

명작 ‘시녀들’도 바로 펠리페 4세 때 나왔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역사적인 작품이다. 〈시녀들〉은 마르가리타가 다섯 살일 때 그려진 초상화이다. 마르가리타는 오스트리아 왕실의 레오폴트 1세와 결혼하기로 예정되어 있어, 벨라스케스는 오스트리아 왕실에 보내기 위한 마르가리타의 초상화를 여러 점 그려야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벨라스케스가 이전에 그렸던 마르가리타의 초상화와는 달랐다. 인물만 11명이 등장하는 거대한 집단 초상화였다. 펠리페 4세는 디에고 벨라스케스를 총애하여, 자신의 아들이 죽고 난 방을 그의 화실로 꾸몄는데 지금 보이는 그림의 공간이 그곳이다.





그림 속에 벽에 있는 그림 두 점은, 루벤스의 〈아라크네를 벌주는 팔라스 아테나〉와 요르단스의 〈아폴로와 판〉이 걸려 있는데, 이는 벨라스케스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두 그림은 모두 신에게 도전했다가, 벌을 받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당시 화가의 신분은 예술보다 천한 기술자 취급을 당했었다.



두 그림 앞에서서 정면으로 바라보는 벨라스켓.


하지만 벨라스케스는 신에게 도전하는 그림을 걸어놓고 캔버스 앞에 서서 우리를 바라보며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지켜보라는 듯이 있다.




붉은 십자가로 알아보는 그의 마음


그의 가슴에 그려진 붉은 십자가는, 그 결실 가운데 하나였다. 이건 스페인 산티아고 기사단의 상징인데, 1658년 30년 넘게 궁정화가로 일한 공로를 인정받아 기사 작위를 받았음을 드러내고 있다. 당시 화가의 사회적 지위를 고려하면, 그건 매우 파격적인 조치였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 십자가는 그림을 완성하고 난 뒤 훗날 덧그려진 것일 수 있다는 건데, 그가 기사 작위를 받은 건 〈시녀들〉을 완성하고 2년이 지나서기 때문이다. 처음 이 그림을 그릴 때 십자가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왜 십자가를 나중에 그려 넣었을까?
자신이 이룬 사회적 성공을 과시하고 싶었던 걸까?


그는 사실적 묘사가 뛰어난 화가로, "벨라스케스가 스페인 궁정에 있는 한, 유럽의 어느 왕도 스페인 왕보다 뛰어난 초상화를 가질 수 없다"는 말이 돌기도 했을 정도이다.





금발머리와 소매에 달린 레이스 장식

당시는 대상의 형태를 정확하게 데생한 뒤, 정성스럽게 색을 칠하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이 그림을 다가가서 보면, 소매에 달린 레이스 장식이나 금발머리는 물감을 그냥 쓱쓱 발라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조금 떨어져서 보면 그 물감자국들은 신기하게도 레이스 장식이 되고, 금발머리가 된다.






세모 구조로 나타내는 인물 중요도

공주는 그 자체로 작은 세모이고, 양옆의 시녀들이 이루는 더 큰 세모 안에 들어 있다. 때문에 마르가리타가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듯 보인다.

가운데 공주 오른쪽에는 조용히 엎드린 큰 개와 두 명의 왜소증 환자가 서 있다. 이들은 물이나 음식 같은 필수품들을 갖고 다니며, 언제나 공주를 동행하던 이들이다. 그 뒤로는 수녀복을 입은 여자가 경호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빛으로 중요인물 강조


이 작품에서 벨라스케스는 빛을 사용해 대상에게 부피감을 주는 동시에 우리가 누구에게 초점을 맞춰야 하는지를 드러내고 있는데, 오른쪽에서 들어오는 빛은 마르가리타를 밝게 비춘다. 마르가리타의 얼굴도 빛이 들어오는 쪽을 향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마르가리타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빛의 활용으로 공간 대비감 표현

이 그림에 활용된 빛은 또 있는데, 바로 뒤쪽 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다. 한 남자가 문을 열고 있기 때문에 바깥의 빛이 안으로 쏟아지고, 어두운 배경과 선명하게 대비를 이룬다. 이는 마르가리타에게 붙잡혀 있던 시선을 끌어내 뒤쪽에 초점을 맞추도록 한다. 이를 통해 화면에 거리감을 주고 있다.




국왕의 초상화 vs 거울

왜 국왕 부부가 거울에 비치고 있것인지, 거울이긴 한 건지, 단순한 초상화는 아닐지 많은 이견을 낳고 있다.

많은 학자들은 이 그림을 벨라스케스가 국왕 부부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장면으로 본다. 그렇다면 국왕 부부는 지금 여러분이 있는 바로 그 위치에 있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국왕 부부가 정면의 거울에 비치고 있는 상황이 된다. 그리고 마르가리타 공주와 시녀들은 작업을 구경하려고 화실로 들어오고 있는 장면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어떤 학자들은 벨라스케스가 그리고 있는 건 국왕 부부가 아니라, 마르가리타 공주라고 보기도 한다.



그림주인공 : 국왕부부 vs 공주

만약 그렇다면, 그림 자체가 거울에 반사된 이미지일 수도 있다. 벨라스케스는 거울에 비친 마르가리타를 그리고 있고, 마르가리타는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주인공이 공주라면?

오랫동안 포즈를 취하느라 짜증이 났는지 옆의 시녀가 달래려는 듯 음료수를 건네고 있다. 공주가 주인공이라면, 국왕 부부는 거울 속 거울에 이중으로 반사되고 있는 게 된다.


시녀들 사이에서 가운데에 위치한 귀여운 마르가리타 공주 단독 초상화가 이번 전시회 때 왔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 흰 옷을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멀리서 보면 반사되는 옷감 처리를 아주 디테일 하게 잘 그린 것 같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제대로 그린게 하나도 없다. 마무리 손 터치도 너무 투박하게 성의 없게 끝났다. 손톱도 안 그려 놨다. 그런데, 멀리서 보면 너무 자연스럽게 보이는 게 바로 벨라스케스식 알라프리마 기법이다. 잘 느껴보려면 멀리서도 보고 가까이서도 봐서 터치가 얼마나 투박한지를 비교하는 걸 적극 추천한다. 벨라스케스가 당시 초상화를 그릴 때, 그림과 같은 붉은 천을 많이 사용했다.





7) 카를로스 2세

카를로프 2세 초상화


펠리페 4세의 아들인데, 갈수록 주걱턱 상태가 안 좋아진다. 마르가리타 공주 역시 어린 시절 좀 건강하다 생각했는데 오래 못살고 21살 때 넷째 아이를 낳다가 일찍 요절한 불쌍한 황녀이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자식들이 일찍 요절하는 경우가 되게 많다. 아이가 나오면 바로  죽거나 오래 못 산다. 기형이거나 하필이면 아들이 하나밖에 없는데 까를로스 2세가 역대급으로 병약하게 태어난다. 그리고 지능도 엄청 낮았다. 5살 때나 뒤늦게 말을 터득하고 숫자를 반복해서 아이처럼 따라 부르기로 했다 한다. 몸도 병약한데 기형적으로 태어났고 턱도 기형이고 오래 못살고 또 일찍 요절한다. 아들을 못 낳아서 스페인에서 그 대가 끊긴다. 그래서 스페인의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난다.

크게는 합스부르크 왕가와 루브봉 왕가 간의 큰 전투가 일어났는데, 규모는 좀 작았을지도 모르지만, 여러 왕국, 왕가가 개입했던 세계 대전에 가까웠던 전쟁이다. 근데 거기에서 결국에 합스부르크 왕가가 폐하면서 스페인에 프랑스 혈통의 부르봉 왕가가 들어오게 된다.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대가 카를로스 2세에서 끊겼다.







* 신성로마 제국


8) 루돌프 2세

요제프 하인츠 - 루돌프 2세 초상화


오스트리아, 독일, 헝가리에서는 신성로마 제국이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 르네상스 말기 시절 루돌프 2세로 다시 돌아가면, 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이다. 이 분도 약간 턱이 튀어나와 있다. 동시에 보헤미아, 크로아티아, 헝가리 국왕이었으나 왕으로서의 정치적으로 무능했던 그런 국왕이다. 신교도에 호의적이다 보니까 그 친척이었던 펠리페 2세 스페인 국왕이 루돌프 2세를 어릴 때 왕으로서의 교육받게 해서 나주에 황제가 되게 한다. 왜냐하면 가톨릭의 성향을 가진 게 바로 합스부르크 왕가이다. 펠리페 2세가 광신도적으로 가톨릭을 수호한다는 그런 강박이 있었다. 신교도로 넘어갈까 두려운 나머지 스페인에서 국왕교육을 받게 한다. 정치적으로 매우 무능력했고 가면 갈수록 정신질환이 악화가 된다. 나중에는 자신에게 악마가 들어왔다고 이런 판타지적인 세계관을 가지가 되면서 점점 미쳐 갑니다. 하지만 문화 황제로 불리면서 많은 미술품들을 잘 수집해서 지금의 빈 미술사 박물관 컬렉션을 있게 한 가장 큰 공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 말년에 동생에게 왕권을 빼앗기면서 프라하에서 계속 있었다. 근데 프라하의 문화 발전에도 많은 공을 세웠다고 많이 평가를 한다. 그리고 말년에는 점점 가면 갈수록 연금술에 도취되면서 미신도 많이 믿었다. 노스트라무스와도 좀 친분이 있었던 루돌프 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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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2세가 나이가 많아질수록 볼이 더 튀어나온다. 그는 특이한 화가 스타일을 되게 좋아했다. 다른 왕 같으면 되게 싫어했을 그림들을 이해한다.

주세페 아르침 볼도 - 루돌프 2세 계절의 여신 베르틀누스

주세페는 매너리즘 화가로 보퉁 분류한다. 국왕을 계절의 여신 베르툼누스로 표현한 작품이다. 당시에 루돌프 2세의 왕과 이 나중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공식적인 왕관이 되기도 했었다. 왜냐하면 그는 보석 수집광이었다.







9) 마리아 테레지아

아티판 메이텐스 2세 - 마리 테레지아 초상화

신성로마제국시절 보기 드물게 여대제가 역사적으로 등장한다. 현재까지도 존경받는 “마리아 테레지아” 신성로마제국의 황후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본인이 통지한다. 동시에 형가리, 크로아티아의 여왕, 오스트리아의 대공, 독일의 왕비였다. 그 국왕은 힘이 없었던 프란츠 슈테판인데, 보기 드물게 연애 결혼 했다.  까를 6세 아버지가 연애결혼을 허락해서 가능했다. 그래서 금슬이 매우 좋았던 부부였다. 까를 6세가 딸을 왕으로 시키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아들을 못 낳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른 유럽 공국, 또 프랑스, 영국 대다수 유럽 국가들과 딸에게 황제권을 물려줄 수 있도록 협상을 해놨다. 근데 딸이 황ㅈ가 되면서 말이 바뀐다. 프로이센이 슐레지엔에 쳐들어 온다. 그래서 마리아는 어떻게든 프로이센에게 빼앗긴 슐레지엔 영토를 탈환하고 싶어 해서 7년 전쟁을 일으킨다. 이전까지 프랑스와 사이가 되게 안 좋았던 게 합스부르크 왕가였는데, 이 프로이센을 견제하기 위해서 프랑스와 동맹을 맺는다. 정치적으로 매우 유능했던 여제다. 물론 7년 전쟁에서 실패해서 슐레지엔 탈환은 실패했지만, 신성로마제국의 남편 프란츠가 황제가 되는데 공식적으로 유럽에서 인정받게 된다. 내정개혁에도 많은 공을 세웠다. 이전과 다르게 귀족에게도 세금을 매겼고 의무교육을 역사적으로 유럽에서 최초로 실시했다. 그리고 당시 매춘을 금지시켰다. 군사계획을 해서 당시 군사력을 높이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딸이 바로 마리 앙투아네트다.

안드레아스 밀러 - 젊은시절 마리 테레지아 초상화



안톤폰 마론 - 검은 상복을 입은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테레지아가 남편 프란츠가 죽고 무려 15년간 상복을 입었다고 한다. 그만큼 남편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




 

요한 카를 아우어 바흐 - 마리아 크리스티나 대공의 약혼 축하연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등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유일한 여성 통치자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군주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총애한 딸, 마리아 크리스티나 대공의 약혼 축하연을 그린 작품이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란츠 1세는 딸이 작센의 공작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이 약혼식은 프란츠 1세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에 열릴 수 있었다.

그림 속 검은 휘장은 프란츠 1세에 대한 추모의 의미다. 마리아 테레지아 역시 남편을 추모하여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ㄷ자 테이블 왼쪽 끝에서 두 번째에 앉은 작은 소녀는 훗날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되는 마리아 안토니아 대공이다.










10) 마리 앙투아네트

알리자베스 비제 르 브룅 - 마리앙투아네트


테레지아의 딸이었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에 시집을 간다. 루이 16세의 아내가 된다. 다른 마리 앙투아네트 초상화를 보면 아름다운 그림도 있는데,  초상화는 다른 초상화에 비해 어색해 보이고, 유난히 코가 빨갛다. 이번 전시회에 볼 수 있다. 당시 여성 궁정화가였던 엘리자베스 비제르 브룅, 로코코와 신고전주의 성향을 둘 다 가지고 초상화이다. 다른 왕비에 비해서 심한 사치는 아니었지만, 시대가 시대인 만큼 조심했어야 했다. 엄마인 마리 테레지아가 편지를 보내면서 “사치를 조심해라. 영국에서 난리가 났다. 프랑스도 심상치 않으니 조심해라”라고 경고를 했다. 어머니 말을 무시하다가 결국 단두대에 처형당하다.







11) 프란츠 요제프 1세

미하이 문차키 - 프란츠 요제프 1세


신성로마 제국이 와해가 되고 이젠 합스부르크 왕가의 명맥을 겨우 유지했던 시대다. 세를 잃고 몰락해 가는 합스부르크 왕가다. 프란츠 요세프 1세는 오스트리아의 황제이면서 헝가리의 왕이었다. 이 분이 세르비아 침공으로 1차 세계 대전을 야기시킨 인물이다. 빈이라는 도시를 지금의 아름다운 예술의 도시로 근대화를 한 공을 세웠다. 지금의 빈 미술사 박물관을 건립한 공도 세웠다.


 



12) 엘리자베스 (시시) 황후

요제프 호라체크 - 엘라지베스 황후


시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당시 왕족들 중에 가증 미인이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의 황후이면서, 보헤미아의 왕비, 헝가리의 왕비였다. 유럽 왕족들 중에 허리가 제일 가늘었다. 다이어트에 집착했다고 한다.

자유분방한 성격 엘리자베트
황제 눈에 띄어 언니 대신 결혼
보수적 시어머니 대공비와 대립
왕관의 무게와 자유 사이서 고뇌
다이어트 집착 평생 허리 20인치 유지
길고 풍성한 머리를 위해 매일 화장대에서 3시간 이상 보냄
30세 이후론 초상화를 남기지 않음
자신의 예쁜 모습만 간직하기 위함
173㎝의 키와 몸무게 46-49kg, 빼어난 미모, 우아하고 기품 있는 분위기, 이와 더불어 자유분방한 성격과 행동으로 화제를 몰고 다녔다. 하지만 왕족으로서의 운명과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은 자유 사이에서의 갈등을 멈출 수 없었고 끝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억압적인 황실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다가 어느 무정부주의자로부터 암살을 당했다.

어렸을 때의 별칭 ‘시시(Sisi)’를 제목으로 삼은 영화 ‘시시’ 3부작이 오스트리아에서 제작됐고, 그중에서도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시리즈 ‘황후 엘리자베트’는 그의 고뇌를 누구보다 깊숙하게 파고든다. 






13) 스테파니 황태자비 - 한스 마카르트

한스마르크 - 스테파니 드 벨지크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며느리, 작생부르크고 타 왕가이다. 17살 때 루돌프 황태자와 혼인했다. 그림은, 약혼기념으로 그린 초상화이다. 그런데 루돌프 황태자가 바람을 피우면서, 내연녀와 동반자살한다. 이후 재혼을 하고 헝가리에서 행복한 삶을 살았다. 러시아 군에게 쫓겨나면서 말년에는 수도원에서 아주 비참한 생을 마감했다.







14) 고종의 선물

1894년도 고종이 오스트리아 요제프에서 선물했던 갑옷
1894년도 고종이 오스트리아 요제프에서 선물했던 투구



오스트리아와 조선은 1892년 수교를 했다.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구 여러 나라와 수교를 하고 있었는데, 당시 오스트리아는 동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해서 러시아를 견제하려 했고 자국의 상인이 조선 개항장에서 법적 보호를 받으며 안정적으로 활동하길 바랐다. 이렇게 두 나라의 이해관계가 잘 맞아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고종은 수교에 대한 선물로 조선의 갑옷과 투구를 오스트리아로 보냈고, 이 선물은 1894년 2월 10일,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의 수집품으로 등록됐다. 130년이 지난 올해, 이 선물이 다시 한국을 찾았다. 19세기말 포형 갑옷(위아래가 원피스처럼 붙은 갑옷)과 투구인데 놀라울 정도로 잘 보존돼 있다.












 
 
 

<<  주요 작품  >>



1) 피터르 파울 루벤스

피터르 파울 루벤스 - 주피터와 머큐리를 대접하는 필레몬과 바우키스

벨기에를 대표하는 17세기 바로크 화가 피터르 파울 루벤스가 그린 작품이다. 그리스 신화의 주피터 (=제우스)와 그의 심부름꾼 머큐리(=헤르메스)가 인간으로 변신한 다음에 마을로 왔다. 근데 이 마을 사람들이 야박하게 이 나그네 둘을 신인 줄도 모르고 쫓아낸다. 그러나 필레몬과 바우키스 부부는 마음씨가 너무 착해서 이 가난해 보이는 나그네 둘을 정성스럽게 맞이하면서 대접해 주는 장면이다. 없는 살림에 먹을 것을 차려왔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아껴 키운 거위조차 고기로 잡으려고 하는 장면인데, 이 거위가 주피터와 머큐리 신들 사이로 도망쳤다. 신들은 부부만 산꼭대기로 피신시킨 후 이 마을을 홍수로 다 초토화시킨다. 야박한 인간들에게 벌을 내렸다. 하지만 물에 잠겼던 이 집은 어느 순간 신전, 화려한 집으로 변해있었다. 신이 이 착한 부부에게 선물을 내린 것이었다. 그래서 신전에서 제우스 신을 모시는 그런 역할을 했다. 루벤스의 생동감 있는 터치, 살아 숨 쉬는 듯한 에너지를 잘 표현한다.






파터르 파울 루벤스 - 은둔자와 잠자는 안젤리카

루벤스가 이 통통한 여자에 대한 성적 판타지가 있다. 부인도 당시 풍만한 몸매를 가진 여인이었다. 루벤스 50대에 16살 소녀 헬렌 루프망과 결혼한다. 이 그림은 로드비코 아리오스토 작가의 ‘광란의 오를란도’라는 그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이 은둔자가 구애를 해도 이 여인이 넘어오지 않자 약을 먹이고 잠들게 해서 이 여인에게 접근하는 긴장감이 넘치는 장면을 루벤스 특유의 에로틱한 감성으로 그린 작품이다. 루벤스의 손을 거치면 아주 다채로운 컬러의 생동감 있는 피부톤이 이렇게 완성이 된다. 루벤스가 워낙 인기가 많은 화가라서 당시에 주문이 넘쳐나서 100명이 되는 공방의 화가들과 협업을 했다. 그래서 밑그림만 스케치하고 초벌, 중벌까지 제자들이 다한다. 그리고 마무리만 루벤스 원장님이 하는 그런 방식이었다. 루벤스가 터치를 하면 피부톤이 지금의 그림처럼 바뀐다. 그래서 루벤스가 그린 그림인지 구별이 된다.






2) 베로네세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과 이브


이탈리아 베네치아파 출신의 베로네세, 이제 부끄러움을 느끼는지 몰라도 옷을 입고 있는 작품이다. 쫓겨나다 보니까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베네치아파 특징은 아주 또렷한 디테일 형태보다는, 흐리멍덩한 외곽처리이다. 작품에서는 채도가 높진 않지만, 다른 작품에서는 다채로운 컬러도 많이 쓴다. 그리고 뿌연 느낌과 흐물거리는 특유의 터치가 있다.




동방박사의 경배

뿌연 느낌은 베네치아 파 티치아노의 영향이 있다. 르네상스 말기라서 이 분을 평가할 때 전성기 르네상스 화가로 평가하면서 동시에 매너리즘 화가로 분류하기도 한다. 비례가 조금 어색한 게 있기 때문이다. 매너리즘 시대의 특징 중 하나가 인체 비례가 어색한 화가들이 등장한다. 성모 마리아의 얼굴이 과도하게 작다. 아기 그리스도가 탄생하고 동쪽에서 온 예언가들이다. 성서에서는 박사라는 어려운 말을 쓰는데 황금 몰약 유향을 바쳤던 동방에서 왔던 세 사람 그 이야기를 그렸다.






3) 안드레아 이피아니

나폴레옹 1세 초상화


나폴레옹이 단신이었다. 옷을 매우 화려하게 입고, 왕관도 굉장히 화려하다.








4) 안토니 반 다이크

안토니 반 다이크 - 야코모 데 카시오핀 초상화

안토니 반 다이크가 당시에 초상화로 굉장히 유명한 화가였다. 저채도의 분위기 있는 갈색 톤을 아주 매력 있게 표현했던 화가다. 반다이크라는 갈색물감도 있다. 루벤스 위 수석제자 출신이다.

루벤스는 반 다이크를 ‘내 최고의 제자’라고 부르며 아꼈다. 하지만 영국 왕 제임스 1세를 비롯한 수많은 왕족과 귀족이 루벤스 대신 반 다이크를 지명해 그림을 주문하면서 사제 관계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야코모 데 카시오핀’은 반 다이크가 왜 초상화 거장으로 평가받는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반 다이크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왼쪽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자세를 통해 친구인 카시오핀의 세련된 취향과 기품을 표현했다. 어두운 배경과 검은 옷 덕분에 관람자는 카시오핀의 얼굴과 손 표현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5) 얀 브뤼헐 1세

얀 브뤼헐 1세 - 꽃다발을 꽂은 파란 꽃병

브뤼헐 가문은 대표 화가가문이다. 피터르 부뤼헐의 둘째 아들인 얀 브뤼헐의 그림이다. 아버지한테 그림을 배웠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태어나고 바로 아버지는 사망한다. 다른 화가들에게 그림을 배웠고 그 당시 절친이 루벤스였다. 얀 브뤼헐은 정물화, 풍경을 매우 잘 그리던 화가였다. 디테일의 끝판왕이다. 바로크 시대 작품이다.




얀 브뤼헐 1세 - 이집트로 피난 중 휴식

성가족이 헤로다 왕 학살을 피해서 이집트로 가는 성가족 (성모 마리아, 아기 그리스도, 성 요셉)이 피신 가는 과정을 풍경과 조화롭게 그린 작품이다. 천사도 꽃을 들고 있는데 주특기가 식물그림인 것 답게 터치 디테일 묘사를 너무 잘 살렸다. 인터넷 이미지는 누리끼리하지만, 실물은 컬러가 훨씬 더 좋다.








6) 얀 브뤼헐 2세

얀 브뤼헐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풍경화와 정물화 둘 다 잘 그렸는데, 아들은 풍경화를 더 많이 그린다. 친구가 반다이크이다.

얀 브뤼헐 2세 - 성모마리아와 아기예수

이 플랑드르 지방에 파티니르라는 초창기 풍경화가 있는데, 색감에서 그 스타일이 보인다. 아버지와 아들 둘 다 색감을 시원하게 잘 구사하는 특징이 있다. 얀 브뤼헐 집안이 꽃을 정말 잘 그린다. 꽃을 디테일 하게 잘 그려냈다.








 

5) 야코프판 라위스달

야코프판 라위스달 - 폭포가 있는 풍경

시대적인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풍경화를 보면 주연이 아니라 그저 배경으로써 역할을 했다. 종교 이야기, 그리스신화, 문학이 등장한다. 그러나 오직 풍경만 그렸다. 이런 장르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게 17세기 플랑드르 지방이었다. 그 대표 화가 중에 한 명이 바로 야코프 판 라위스달이다. 네덜란드 대표 풍경 화가로, 히이옌이라는 풍경화 영향을 받아서 저채도의 분위기 있는 컬러를 사용한다. 이 감성이 나중에 영국 프랑스의 낭만주의 풍경화가들에게도 영향을 줬다. 그리고 사실주의 풍경화에도 영향을 줬을 것이라 본다. 풍경을 위한 풍경화의 초창기가 이 무렵에 등장했다.









6) 카펠로 루스코니

카펠로 루스코니 - 성 안드레아

카펠로 루스코니 18세기 조각가다. 12 사도 조각으로 유명하다. 12 사도 중에 성 안드레아는 x 자 십자가로 죽음을 맞이하는데, x 자인 이유가 그리스도의 그리스 언어로 그 약자 첫 번째 글자가 x 자 이기 때문에라는 말이 있다. 크리스마스 약자가 x 인 이유가 이 x라고 한다.







7) 태피스트리

* 태피스트리 뜻 : 여러 가지 색실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 벽걸이나 가리개 따위의 실내 장식품으로 쓰인다.

기적의 물고기 잡이

“기적의 물고기 잡이”
디자인 - 라파엘로 산치오
제작 - 야콥 괴벨스 1세

테피스트리 작품으로, 원작이라 보다는 라파엘로 산치오의 디자인을 복사를 한 많은 작품 중에 하나를 오스트리아 가문이 수집한 것이다.  이 태피스트리는 양모와 실크로 이뤄졌다. 기적의 물고기잡이가 뭐냐면, 성 베드로가 원래 베드로 이름이 아니라 예수님이 지어준 별명이다. 시몬시절에 물고기잡이 베드로에게 물고기가 계속 불어나는 기적을 직접 보여준다. 그래서 이 뒤로 베드로가 첫 번째 제자가 되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아테네에서 설교하는 사도바울


"아테네에서 설교하는 사도바울"
디자인 - 라파엘로 산치오
제작 - 야콥 괴벨스 1세


사도 바울은 실질적으로 기독교 전파의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도죠. 바울이 아니라 본래 사울이었다. 원래 그리스도를 무시했던 사람인데 나중에 회개하면서 적극적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제자가 된다. 그리스에 가서 사법 평의회에서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사도 바울을 묘사한 장면이다. 본래에는 바티칸 궁에서 라파엘로에 가 시켰다. 테피스트리 복사본을 프란츠 2세 때 구입을 해서 지금 빈 미술관 박물관에 남아있다.






* 참고 유튜브 : https://youtu.be/bbl2-ysrf8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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